MP: 유진 님이랑은 올해 아르코 전시를 통해서 처음 만나게 되었고 당시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계셨는데요, 미팅 때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하다 처음으로 우테나를 언급했던 걸로 기억해요. 우테나는 이전 프로젝트 〈빈랑시스〉(2021-22) 챕터 2를 제작할 당시 중요한 레퍼런스 중 하나로 엔딩 크레딧 부분은 우테나의 오프닝을 직접적으로 차용했어요. 회화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서사적인 측면에서도 홍콩 영화 〈청사 靑巳〉(1993)의 짤막한 애프터 스토리를 퀴어하게 구현하기에 우테나가 적합한 레퍼런스였어요. 당시 백합물을 찾다가 우테나를 발견했는데 처음에는 “정말 너무 이상한 애니다! 그리고 그게 좋다”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우테나에 대해 막상 조사를 시작하니 이야기할 거리가 너무 방대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소녀혁명 우테나: 잡담 1부〉에서는 우테나를 처음 봤을 때의 감상과 기본적인 정보들을 공유해 보도록 해요!
EHP: 작가님이 〈빈랑시스〉에 우테나의 오프닝을 차용하신 것은 처음 알았네요. 특히 어떤 부분 때문에 애프터 스토리로 잇고 싶으셨나요?
MP: 우테나 오프닝에 ‘깨끗하고 멋지게 살아가자’라는 문구가 나와요(어떤 영상은 ‘떳떳하고 멋지게 살아가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빈랑시스〉가 깨끗함과 더러움에 대해 질문을 하는 프로젝트라 그 워딩이 제 필터에 걸렸어요. 우테나와 안시는 불온한 존재들입니다. 순응하지 않고 자꾸 세계에 구멍을 내려고 하거든요. 그리고 제겐 〈빈랑시스〉 에서 청사와 백사가 환생하여 빈랑시스가 되었다는 설정이 중요했어요. 남성들을 ‘미혹’하던 불온한 존재였던 그녀들이 ‘굳이’ (불온한) 빈랑시스로 환생하여 ‘난 깨끗하게 살 거야’라고 우테나로 발화하는 순간 갑자기 깨끗함이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깨끗하면서 동시에 그렇지 못한 존재, 둘 다이면서 둘 다가 아닌 존재로요.
MP: 극장판을 다시 보면서 우테나가 이상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추적해보니: 1)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학교 오오토리의 SF적이면서도 동시에 유럽풍으로 장식된 건축 그리고 더불어 유럽 근대식 제복 스타일의 교복–
EHP: 얼마 전에 〈듄 Dune〉 세계관 배경을 추적하다가, 기계에 의존하는 것을 반대하는 설정이 중세 시대를 차용했던 큰 이유였음을 알게 되었어요. 우테나도 마찬가지로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혼종적인 유럽 중세, 근세, 근대의 건축 양식과 옷들이 마구 뒤섞이는데 폐쇄적 세계를 표현하는 흥미로운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고요. 이 양식들은 탈출을 극대화하는 시각화 장치로 작동해요. 예를 들어, 학교가 하나의 건물로 완성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계단이나 어디론가 이어져 있는 아치 등으로 만들어져 있죠. 외부에 완전히 개방된 것 같지만 미로처럼 길을 잃게 만들어 폐쇄되어 있는 형태를 취하는 등 이 공간적 설정이 주인공들의 심리적 설정과도 이어지는 것으로 보여요–
MP: 2) TV 속의 TV 같은 설정들, 섀도 플레이(예를 들면 ‘카더라 통신’처럼 00가 000 했다더라 하는 식으로 중간중간 상황을 보고한다던가)–
EHP: 2 번은 아래의 6 번과 연결되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 〈신세기 에반게리온 新世紀エ ヴァンゲリオン〉에서도 찾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무대'와 '극'을 장치로 선택한 것에도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개인의 심리적 변화를 드러내기 효과적이어서 그랬을까요? 또 다른 이유로 카더라 통신은 ‘옛날에 옛날에 공주님과 왕자님이 있었는데~’처럼 전형적인 동화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차용하는 좋은 예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MP: 3) 개연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정체불명의 동물들(극장판에는 아주 짧게 나오지만요) 4) 다소 이상한 웃음 포인트 5) 앞뒤 맥락 없이 등장하는 장치들(예를 들면 갑자기 하늘에서 세차장이 떨어져서 우테나를 씻겨버린다던가) 6) 트루먼 쇼 같은 장치들, 마치 세트를 차려놓고 거기서 주인공을 관조하는 느낌(예를 들면 우테나가 누군가를 찾으려고 달려가는 곳에 표지판을 달아 유도한다던가, TV 시리즈에서는 손 모양 이모티콘이 어딘가를 가리키기도 함) 7) 다소 충격적인 스토리 설정들(예: 강간을 암시하는) 8) 우테나의 머리가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한다던가... 처음 우테나를 봤을 때 전체적인 첫인상은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게 있고, 그걸 개연성을 고려하지 않고 컬트적으로 엮은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EHP: 저도 처음에 우테나를 접했을 때 혼란스러움과 난해함을 즐겼던 것 같아요. 갑작스레 등장한 외부인이 그 세계를 구할 사람이었다는 설정은 어렵지 않았지만 1) 전투용 검을 안시의 가슴에서 꺼내거나, 인물들이 수시로 변신하는 등 결투를 펼치는 방식 2) 관계와 대화에 따라서 계속해서 바뀌는 배경, 사물, 그림 3) 왕자님과 공주님의 관계와 역할에 대한 해석(극장판과 TV판이 다른 방식으로 이를 접근하는데 그 차이를 보는 재미도 있어요) 4) 펜싱, 레이싱 경기의 활용 5) 과거의 트라우마가 재현되는 방식 등.. 이야기를 시작하자니 끝도 없이 나눌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계를 혁명하는 힘과 구하는 힘이 ‘우리'에게서 온다는 것, 관계성이 세계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바깥에 있는 큰 틀이라는 구성이 가장 좋았어요.
MP: 우테나 애니메이션은 이쿠하라 쿠니히코, 소위 백합의 아버지(웃음)라 불리는 감독이 제작했는데요, 이쿠하라는 세일러문의 애니시리즈/극장판 감독 중 하나로도 잘 알려져 있어요. 세일러문을 제작할 당시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을 90년대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원작을 변형한, 당시에는 다소 파격(?)적인 본인의 의견을 많이 반영하였다고 해요.덕분에 퀴어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고요(쿤차이트-조이사이트, 우라노스-넵튠, 피쉬아이). 세일러문은 만화와 애니가 동시에 기획되었는데 원작자인 타케우치 나오코와 이쿠하라 사이에 의견 불일치로 갈등이 있었고 결국 이쿠하라는 도중에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 그는 세일러문에서 맘껏 발산하지 못한 요소들을 한껏 끌어모아 우테나를 제작합니다.2 우테나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엔딩인 것 같아요. 애니 시리즈와 극장판이 조금 다른 거로 아는데요, 극장판에서는 우테나와 안시가 ‘바깥 세계’로 성공적으로 탈출하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다만 희망찬 분위기는 아니고 실패할지도, 혹은 실패할 거라고 암시하는 다소 어두운 분위기이긴 해요. 여기서 재미있었던 점은 우테나와 안시가 ‘바깥 세계’로 탈출할 것을 결심하는 순간 우테나 앞에 뚝 떨어진 세차 기계였어요. ‘WASH’라고 적힌, 불온한 것을 씻어버리겠다는 너무나 직접적인 메타포가 웃기기도 하고 난데없이 등장해서 심지어 우테나를 자동차로 변신시키는 이런 장치들이 기이/기괴하면서 인상에 많이 남았던 것 같아요.
EHP: 저도 특히 왕자와 공주의 역할 놀이에서 벗어나겠다고 하는 순간부터 쭉 전개되는 경주 씬이 인상적이었어요. 안시가 우테나에게 자신을 주고 우테나를 진정한 왕자로 인정하겠다고 하자, 우테나가 이를 거부하죠. 대신 게임 자체를 벗어나자고 제안합니다. 자동차 모티프는 뒤에 경주와도 맞물리지만 경주에 앞서 열쇠라는 사물과도 연결됩니다. 사실상 폐쇄된 세계의 주인인 아키오가 '열쇠가 없으면 차가 녹슬어'가 중얼거리는 부분이 결정적인 근거이죠. 안시는 잠시 아키오처럼 녹슨 것 같은 자동차(우테나) 앞에서 망설이지만, 바깥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하자 자신만의 열쇠를 손에서 찾고 이를 통해 우테나를 운전하게 됩니다. 즉, 우테나가 자동차가 되어 동력을 제공하지만 결국 페달을 밟고 운전하는 것은 안시라는 점에서 안시가 스스로를 혁명의 주체로 자리매김합니다. 특히 초반에 장미의 신부로서 기계처럼 종속되는 부분과는 대조되는 부분이죠. 앞의 난해한 부분들이 누가 어떻게 혁명을 일으키는가라는 소실점을 향해 달린다고 볼 수 있어요. 작가님 말처럼 직접적인 메타포가 대놓고 드러나서 더 난해하고 기이하게 느껴진 동시에 여러 메타포들이 엉켜 서사에 덧대어지면서 여러 해석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즐거움도 있어요.
MP: 〈소녀혁명 우테나〉의 혁명의 주체는 우테나가 아닌 안시라는 평들이 꽤 있던데요, 저도 이것에 공감하면서 봤어요. 어떻게 보면 우테나는 봉합이 잘 된 존재 같았고(그게 가끔 터져서 다시 재 봉합되더라도) 안시는 거기서 뜯어져 나온 틈 자체 같은, “적이야 아군이야?, 그래서 대체 A야 B야?”라는 질문을 하게끔 하는 존재 같았거든요.
추신. MP: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 機動戦士ガンダム 水星の魔女〉가 얼마 전에 방영을 시작했는데 다들 우테나 2022버전이라고 하더라고요? EHP: 저는 미소년 전사 세일러문 S를 한번 달릴까 고민하는 중이에요(웃음). 같이 보아요.
1 《소녀혁명 우테나》(일본어: 少女革命ウテナ)는 감독 이쿠하라 쿠니히코(幾原邦彦), 각본가에노키도 요지(榎戸洋司), 작화가 하세가와 신야(長谷川眞也), 만화가 사이토 치호(さいとうちほ)가 속해 있는 창작 집단 비파파스(Be-PaPas)가 기획한 작품으로, 1997년 4월부터 TV 도쿄를 통해 39화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제작, 방영되었고, 1999년에 극장판 《 Adolescence 묵시록》이 상영되었다. 국내에서는 1998년 대원미디어에서 비디오로 출시하였으며, SBS에서도 방영할 예정이었으나 심의 문제로 무산되었다, 위키피디아 2〈세가지레이어로읽는우테나〉, 트위터 인레@inle_in_err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