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은 하나로 편리하게 수렴되는 의미에 균열을 낸다. 무니페리는 2016년작 〈포털〉, 〈나는 네코버스를 꿈꿔 왔다〉에서, 그리고 어쩌면 그 이전부터 틈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탐색해왔다. 특히 어둠 속에서 푸른색으로 형광을 발하는 지름 3미터의 원형 작품 〈포털〉은 만화나 SF영화에서의, 시공간을 관통하는 틈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틈은 물성을 입은 채 나타나기도 하지만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이동의 통로, 보이지 않지만 찾게 되는 ‘무엇’, 그리고 타자로 등장한다. 작가가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 발표한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지 말아주소서〉(2019, 이후 〈무저갱〉)에서도 틈은 다양한 양상으로 떠오르면서, 전작보다 더 견고한 맥락 안에서 의미를 파열하게 하는 서사의 요소이자 장치가 된다. 17분 31초의 영상에서 작가는 페미니즘과 비거니즘 논의를 거쳐가며, 다른 종에게 빚지면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찰했다. 작품을 구성하는, 가혹하고 직설적인 이미지로 구현된 애니메이션과 네 편의 영상은 서로의 몸에 침투하는 육체와 “겹침의 공간에서 살리면서 죽이는” 행위에 대한 문화⋅사회적 면면을 겨냥한다. 요동하는 이야기의 문을 여는 것은 김혜순 시인의 《피어라돼지》(2016)에서 발췌된 시이다. 돼지의 입으로 여성을 말하는 문장은 오염되고 비어있는 몸이 다루어지는 방식과, ‘나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한 존재가 계속 나에게 되돌아옴’에 대해 토로한다. 영상속 돼지는 무채색의 격자무늬 패턴을 몸에 입고 시와 작품을 매개하고, 우리는 모두 타자의 비어있는 몸으로부터 태어나 다른 몸을 먹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쩌렁쩌렁한 기계음으로 말한다. 이때 격자무늬 패턴은 포토샵 환경에서 투명한 레이어를 표시하는 것으로, 빈 것으로서 뒤채이는 군상,하위, 틈으로서의 육신을 지시한다.

그러나 무니페리가 선택한 시나리오의 주제는 육식에 대한 단순한 규탄이 아니다. 비거니즘(Veganism)을 실천하면서 그 의미를 파고드는 작가의 물음이 작품 제작의 동기가 된 만큼,서사는 약 1년 반의 연구 기간 동안 수집한 기록에 의해 담론의 저변으로 뻗어간다. 이는 일견 비슷한 이야기로 보이나 결국 엇갈리는 논의를 ‘하나의 의미’로 결론짓지 않은 채 놓아둔 것이다. 〈무저갱〉에 “욱여넣어지지 않는” 영상의 부분을 삭제하지 않고, 〈삐져나온 이야기들〉로 떼어 제시한 것 역시 “쉽게 좁혀지고 통합되는 것”으로부터의 거리두기가 그의 작업 태도임을 대변한다. “안전하게 부합하는” 담화의 흐름을 끊는 것은 인간이 훼손한 자연을 인간이 복구하는, “인간에 의한 구원”이라는 틀 안에서 도출된 비거니즘 논의에 대한 반성이다. 작가는 이러한 생각이 죽이기와 ‘나’를 분리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타자의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므로 “죽이기의 바깥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생명활동을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니페리의 주장은 〈무저갱〉의 후반부를 이루는 디네족 이야기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작가는 ‘나바호 네이션(Navajo Nation)’을 순회하며 디네족이 일상에서 양을 축복하고, 도축하면서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여기에서 중심되는 지점은 “내가 양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양이 내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된다”는 발언에 있다. 작가는 고기를 먹는 디네족의 행위가 궁극적인 비거니즘에 맞닿는 지점에 주목하며, 좁은 의미의 비거니즘이 제약하는 정의에 틈 벌리기를 시도한다.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타자”의 윤곽을 더듬는 무니페리의 작품은 ‘나이면서도 너인 상태’의 나를 지각하게 한다. 그는 〈버섯 오케스트라〉(2019)에서 인공 재배가 되지 않는 송이버섯과 그것을 손으로 따는 ‘송이꾼’들이, 채집물과 산업 사회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작품의 기저에 두었다. 그리고 그 서사는 바츨라프 할렉(Václav Hálek)의 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영상으로 은유된다. 버섯의 소리를 기록한 악보는 음률로써 우리가 자연에게, 그리고 사회로부터 배제된 송이꾼들에게 먹을 것을 의탁할 수밖에 없음을 주지시킨다. 이는 〈무저갱〉에서 키메라와 돼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돼지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이종 이식’이 지시하는 바와도 맥을 같이 한다. 타자를 거부하면 죽음이 곧 나를 뒤따르기에 우리는 완전히 나도, 남도 아닌 상태의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유령처럼 솟아오르는 타자는 내 안에 들어와서 흔적을 남겨놓은 틈, 즉 나 자신이 “겹침의 공간”이자 하나가 아님을 알게 하는 ‘정의되지 않는 무엇’이다.

작가는 현재 제작중인 신작 〈빈랑시쓰(檳榔西施)〉(2020-2021)에도 틈과 포털이 이야기의 주된 장치로 등장한다고 말했다. 작가는 한국, 대만, 베를린에서의 ‘여성의 소비’와 더러움, 그리고 틈, 즉 타자에 대한 발화를 계획하고 있다. 불온함의 주체로 연역되는 대상에 대한 탐구는 작품들끼리의 들러붙는 지점을 만든다. 의미와 의미 사이에 빈 공간을 여는 무니페리의 작품은 우리의 시각을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포털이다.

-2020 월간미술 11월호